About

 


Jazoo Yang

South Korean, b. 1979



Jazoo Yang is an artist based in Berlin, enjoying a prolific career spanning Korea and Europe. Yang has attracted attention with her experimental works that traverse the boundaries of various genres, including painting, installation, live painting, public art projects, and street art. The central themes of her work reflect on experiences almost all contemporaries face at least once in their lives—loneliness, alienation, emptiness, futility, and a sense of gradual dehumanization of our times. Yang sometimes employs intense and rough imagery to convey the devastation experienced by those marginalized from society's mainstream—highlighting the ensuing loneliness and bitterness. Paradoxically, she emphasizes the positive value of genuine communication through her practice.

Her work is emotive and sensuous, showcasing a direct interaction between the materials used and the act of creation. Yang's unique spontaneity and speed are evident in the various spaces she works on, including canvases and walls. While her visual artworks already exhibit a strong dynamic quality, her intensity and artistic prowess become even more pronounced during live painting sessions, where the act of painting itself is the art. This is also seen in her performances, where she collaborates extensively with artists from other disciplines. It is this drive that motivates her to continuously push beyond the confines of genres.

Ultimately, Yang aspires to rekindle the sense of community disconnected by the widespread epidemic of isolation. She aims to strike a balance between universal ideals and realism, drawing from a broad spectrum of emotions elicited by art, life, aesthetics, and reality.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 양자주는, 회화, 설치를 비롯해 라이브 페인팅, 공 공 예술 프로젝트와 스트리트 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작업으로 주목 받고 있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체감하는 고독과 소외, 공허함과 허 무함, 점차 희석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 이 주를 이룬다. 주류사회에 편입하지 못한 채 따돌 려지거나 제도의 무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 그로 인해 생겨난 외로움과 쓸쓸함 등을 다소 강하고 거친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진정한 소통의 긍정성을 지적하는 역설을 담아낸다.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양자주 작가의 작업은 재료의 물성과 행위의 결합이 보다 직접적이며, 이에 캔버스며 벽 등, 다양한 공간에 그만의 즉흥적이고 속도감 있는 특성이 고스란히 옮겨진다. 특히 역 동적으로 표현된 시각적 결과물들도 그렇지만 그리는 행위로서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브 페인팅이나 다양한 다른 장르와의 협업을 곁들이는 퍼포먼스 아트 등 에서 작가적 역량은 더욱 강도 있게 발현된다. 이는 한정된 장르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예술과 삶, 미학과 현실 속 다양한 감정들로부터 비롯된 보편적 이상과 리얼리 티를 동일한 등선에 놓 은 채 점차 고립되어가는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들춰내고, 이를 통해 단절 된 커뮤니티의 회복을 꿈꾼다. 한편으론 우리 시대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되물으며 예술의 가치 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실험적인 방식으로 선보인다. 또한 작가 는 자본주의가 예술의 미적 기준마저 재단하고, 대중 취향의 예술이 지배하는 당대 예술 구조에서 예술 존재방식을 돌아 보게 하는 이유이자 변별력으로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상업성을 목표로 예술을 도구화하던, 예술의 순수함을 위해 삶 을 담보하던, 예술가 개인의 선택이자 자유이며 호불호를 논한다는 게 무의미하지만 양자주는 후자의 측면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일궈가고 있는 작가이다.

- 홍경한 (미술평론가





     < 이 모든 것의 피부, 모든 것의 리듬 >

이진실(미학/미술비평) @ The Untitled Void 



베를린과 서울, 부산을 오가며 작업하는 양자주의 작업은 우리를 둘러싼 동시대 기술 문명의 외피나 감각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초고속 인터넷과 글로벌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릴스나 피드를 매분 매초스크롤(scroll)’하고스와이프(swipe)’하고 있다. 양자주의 작업들에서는 반사적이고 빠른 손짓과는 꽤나 다른, 아니 정반대의 손짓과 손의 감각이 중추를 이룬다. 


본디 회화 자체가 인간의 손과 뗄레야 없는 예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자주의 그림들은페인팅이라는 행위와 다소 거리가 있다고 있다. 그녀는 벽화, 그래피티, 찍기, 문지르기, 굳히기 같은 방식으로 그림이라는 행위를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의그리기 고요한 화실, 캔버스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달동네, 공터, 철거촌, 시골 마을과 같은 현실 위에서, 말하자면위에서 출발했다. 그녀의 작업에서 예술에 대한 태도와 근성을 가장 보여주는 작업은 단연 <Dots: 못골 66>(2015)이다. 10 부산 못골의 채를 작가의 지장으로 덮은 작업이다. 낡은 외벽에 찍힌 헤아릴 없이 무수한 인주 자국들은들의 추상이 아니라 붉은 물결처럼 보인다. 이를 무어라 부를 있을까. 허물어질 철거촌의 집을 자신의 지장으로 한달 동안 하나하나 찍어나가는 고행의 행위.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애도. 쓸모없음과 허무함에 대한 무모한 저항이자 비신앙적인 주술. 시간을, 2015년이라는 시간을 떠올려보자. 세월호라는 재난 이후의 시간 속에서 침몰하는 것들과 살아남은 것들에 대한 고통어린 현실 감각 말고 무모한 창작 행위를 설명할 언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작가는수행으로 통증을 다스리는 것이 현실을 다스리는 이며, “통증이 없으면 현실도 사라진다.” 미나토 지히로의 글귀를 노트에 적어 두었다. 2015 부산 못골에서의 작업은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되지만 나선형 궤도처럼 확장된다. 러시아 세인트 페테르부르크 미술관에서 이주민들과 함게 진행한 작업 <Dots: Shosse Revolusetll 84> 비롯해, 프랑스 브장송, 파리, 노르웨이, 베를린 등에서 거주민들과 함께 하는 참여예술 형식을 띠게 된다. 


이처럼 장소에 거주하는 삶의 감각과 실체를 손의 흔적으로 새기고 기억하는 방식은 회화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는 <모든 것의 피부(Skin of Everything)>(2023-) 시리즈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2023년부터 제작된 연작은 경북 영덕이나 서울 관악산 작가가 잠시 거주하는 지역에서 채취한 흙을 분채, 아교와 섞어 캔버스에 배이도록 여러 차례 바른 그림들이다. 특히 영덕의 오래된 초가집에서 채집한 흙과 분채를 사용한 그림들의 경우 파스텔의 색이 더해지고 진주핀이 여기 저기 꽂히기도 한다. 여기에 나염된 조각까지 그림 귀퉁이에 걸리면 회화 환영도 오브제로서의 입체감도 멀쩡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마치 그림이 벽의 귀퉁이가 마냥 아무렇지 않게 걸린 조각이 도취적인 추상 표현주의 회화로 오해할 여지를 보란 듯이 없애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역시 영덕의자취이자피부라고 했다. 모서리나 튀어 나온 어디라도 개의치 않고 걸리는 옷가지들, 덕장에 널린 생선과 해산물들, 그리고 겨울 시래기들까지 많은 걸려 있는 바닷가 마을. 무람없는현실주의 꽤나 매력적이다. 


이처럼 아상블라주에 가까운 그림 모태는 영덕의 오래된 한옥에서 채집한 기와벽, 흙담 등을 빻아 얻은 흙과 본드를 섞어 그린 그림, <한옥, 영덕>(2022)이다. 기다란 패널로 구성된 그림에서 인공 안료는 전혀 없지만 각기 다른 톤의 흙빛, 검은 빛이 거친 리듬으로 직조되어 있다. 갈수록 그림은 캔버스에 짙고 두둑히 배이고, 얼룩덜룩한 정면을 만들어내면서 망각에 저항하는 어떤으로 변신해가는 듯하다. 관악산 흙을 안료와 섞어 사용한 2024 작품 < 위에 살아가는 존재들>(2024)에서는 문지르고 치댄 거친 물성보다 환상적인 색과 모종의 형상들이 등장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형상이 등장했다기보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낙서와 함께 원시적인 손자국 같은 흔적들이 회화의 형상을 대신한다고 해야 것이다. 바탕칠과 그림 자체가 구분되지 않는 그림들은 전후 유럽의 아르브뤼(Artbrut) 떠올리게도 하지만, 무엇보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모티프엎드린 사람 같기도 하고 네발 짐승 같기도 하고, 상징 기호 같기도 형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들이 태고적 동굴 벽화를 상기시킨다. 그건 그녀가 원래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레비스트로스를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지달린 것들, 낙서(doodle) 가까운 형상들은 태고적인 시간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을 창출하고자 하는 충동의 발현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선사학자 앙드레 르루아-그랑(Andre Leroi-Gourhan) 선사시대 그림이 출현한 데에는 사실적인 묘사나 상징의 차원보다 리듬이 먼저였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생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흔적은 뼈나 돌에 깍정이 모양으로 선이나 연속적인 선을 작게 새긴 것들인데 이는 그림의 출발이 회화적인 것이 아니라, 리듬감있는 행위라는 증거다. 흥미롭게도 양자주 또한 그림의 모티프나 찍힌 손자국들이 어떤 형태를 표현하거나 무엇의 상징이라기보다 그저 리듬에 따른 귀결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리듬에 입각한 그리기의 방식은 오래 그녀가 사운드 아티스트 하쿠 승호와 벌인 라이브 페인팅 퍼포먼스 <캔버스 인스트러먼트(Canvas Instruments)>(2013)에서 원형적 구조를 찾아볼 수도 있을 같다. 이때 작가는 커다란 캔버스에 스프링과 플라스틱 컵을 연결한 구조물을 만들었고, 그림을 그릴 발생하는 캔버스 표면의 진동을 사운드로 변환시켰다. 리듬과 동기화되는 그림의 제스처, 그것은 회화가 가장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예술인 음악으로 호환될 있다는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향한 종착지는 그들과 같은추상 아니다. 차라리 그녀의 방향은 그리는 행위와 연동되는 날것의 리듬, 박동이라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손끝, 발끝이 중추가 되는 리듬 말이다. 


보통 우리는 시각 예술이든 공연 예술이든 아니면 하이브리드의 형태에서든 원초적인 충동이나 리듬을 이야기하면, 으레 작업 안에 깃든 예술가의 투혼, 욕망, 무의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양자주의 작업에서 그러한 충동과 리듬은 사적인 차원보다 공시적 차원을 반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리듬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맥락, 삶의 장소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맞닿음의 경계를 작가는 자주피부라고 부르곤 한다. 양자주의 작업에서 피부는 흙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사물 자연의 박피들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인간과 자연,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경계는 무화되기보다 서로에게 전이된다. 어떨 때는 노동자의 사지가 나뭇조각으로 표현되었던 <마지막 기억(The Last Memory)>(2021)에서처럼 신화적으로(혹은 미신적으로) 교환된다. 그것은 동양적 샤머니즘일 있고, 서구적 범신론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작가가 낡은 , 죽은 나뭇가지, 버려진 옷가지나 거리에서 주운 파편들에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은 살아있는/있던 모든 것들의기억이자 흔적이다. 



작가는 20년간 서울, 영덕, 부산뿐 아니라 베이징, 베를린, 런던, 파리,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곳 저곳을 이주하며(그야말로 방랑하며!) 살아왔다. 2017년부터 제작해온 레진 회화 <Materials, Busan+Berlin>(2017-2018) <Immanence>(2018-2023) 연작들은 장소들에게 폐기된 파편들을 주운 넝마주이식 콜라주인데, 이런 방식의 두껍고도 투명한 박제는 물질들의 유예라기보다 인덱스적인 차원을 켜켜이 쌓은 시간의 유예처럼 보인다. <훔쳐진 시간>에서는 끈이나 파이프, 프레임 조각부터 시작해 아주 부스러기 같은 각종의 사물들이 박혀있지만, 초기 <Materials, Busan+Berlin>에서는 오래된 집이나 구조물에서 떨어져나온 페인트 조각이나 박피들이 주를 이룬다. 양자주에게 있어서 그림이 출발한 장소는이었고, 벽들은 언제나 떨어져 나오는 투성이였을 것이다. 철거될 집에 징그럽고도 집요하게 지장을 찍어대던 그녀에게 오래된 벽과 도시의 박피들은 그곳에 정주했던 모든 존재들의 흔적이 각인되어 있는 유물에 다름 아니었을 테다.


그녀가 수집한 다른 피부 그림은가시 그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Thorns>(2021) 작가가 거주하던 베를린 근처에서 수집한 해당화 가시들로 빽빽하다. 나무의 갈색은 금빛부터 검은 빛까지 불균질한 파노라마를 이루고 가시들의 형태도 제각각이다. 한국에서는 엄나무의 가시로 제작한 있고, 어떤 작품은 장의 나무 판넬에 장미과 식물의 가시를 원래 가지에 붙어 있던 배열대로 펼쳐 붙인 것도 있다. 가시들의 배열이 긴장어린 생의 투지이자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리드미컬한 패턴들이라고 , 우리는 그녀의 관심사가 삶의 공간에 속속들이 박힌 존재들의 투쟁과 리듬을 옮겨 적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양자주의 작업은 이처럼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 안에서 상호 연결된 모든 타자들의 기억 마디들을 수집하고 이를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서 다시 환기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하지만 제스처는 애써 신화적이지도, 지극히 사회(비판)적이지도 않다. 작가는신화와 도시, 유기성과 인공성, 감각과 기호 사이의 경계에서 작업한다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양자주의 작업은 레비스트로스가구조적 무의식이라고 일컬었던, 사회 구조 안에서 억압되고 배제한 논리로서 신화의 내적 논리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중성을 감각적으로 재생(replay)시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물질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트랜스형상(transfigurative)적인 그녀의 회화를 마주할 , 우리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더미, 가시, 진주핀 사이에서 떨리는 망각과 기억, 죽음과 삶의 파동을 어쩔 없이 떠올리게 된다.